[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창작에 대하여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한창인 시대, 북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실제로 있었던 결투를 그린 영화다. 재판에서 판결하기 어렵거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자가 왕에게 요청해서 결투로 죄를 가리는 상황이 메인 사건이다. 인간이 판단하기 어려운 일은 신에게 맡긴다는 논리다. 아무리 중세라지만 당시에도 문제가 있다고 여긴 이 제도는 영화 속 사건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하나의 사건, 세 가지 시점
오랜 친구인 장과 자크, 몰락해가는 성주 장과 새로운 영주의 신임을 받는 자크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이 전투에 나간 틈에 자크가 친구의 아내인 마르그리트를 강간한다. 이 사실을 마르그리트가 장에게 털어놓게 되고, 아내와 다른 주장을 하는 자크를 상대로 장이 결투를 신청한다. 강간은 여자에 대한 죄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재산침해죄가 되던 시대다. 명예를 위해서라도 폭로하지 않던 시대, 마르그리트의 도전이 시작된다.
결투 결과, 장이 이기면 자크가 거짓 증언한 결과가 되고, 자크가 이기면 무고죄로 마르그리트는 화형에 처해질 운명이다. 누구하나 죽어야 끝나는 재판, 세기의 대결을 보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결투를 보러 몰려든다.
영화는 한가지 사건을 세 주인공의 시선으로 세 번 보여준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세 번의 상황을 보면서 관객은 당대의 사회상과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진실을 보게 된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결투장면은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게 그려진다.
처음엔 세 번을 반복하는 것에 엄청난 반전을 기대했다. 그러지 않은 것에 살짝 의문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찰라의 눈빛, 말투, 시선의 미묘한 차이가 훨신 더 중요한 거 였다. 사소함이 쌓여서 결국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중세나 현재나 변하지 않았다.
리들리 스콧이라는 감독
에어리언(1987), 델마와 루이스(1993), 블레이드 러너(1993), 지 아이 제인(1997), 글레디에이터(2000), 마션(2015) 등을 감독한 그는 1937년생이다. 감독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이 중에 하나도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음 작품은 최근 개봉한 ‘하우스 오브 구찌’로 이 역시 실제 구찌가의 비극을 다루었다.
대체 어떤 힘이 그를 30년이 넘는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과 주제의식으로 창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까. 연출과 스타일에 대해서는 거론해봐야 입이 아프다. 오히려 영화의 세 주인공과 영주로 등장한 벤 애플렉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도 이 영화에서 자크로 분한 아담 드라이버가 구찌가의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그 외 구찌가 인물로 전설의 배우 알 파치노를 비롯해서 자레드 레토, 제레미 아이언스, 결정적으로 레이디 가가까지. 최근 그의 두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명연기가 유난히 인상적이다. 좋은 배우들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도록 만드는 능력, 그 조차 경이롭다.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
공동극본과 출연을 맡은 두 사람은 1997년 영화 ‘굿 윌 헌팅’에서 공동각본과 출연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로 활약하다가 다시 예전처럼 공동의 극본을 쓰고 함께 출연했다. 벤 애들렉은 야비한 바람둥이 영주 역할을, 맷 데이먼은 몰락한 귀족의 우직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함께 극본을 쓰면서 각자의 역할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구축해나갔을 오랜 두 친구의 협업, 이 또한 근사하다.
불후의 창작은
잠시 반짝이는 천재성으로도, 혼자 잘나서 이룰 수 있는 결과가 아니란 것을 이 영화가 증명하고 있다. 도전하는 지속가능한 열정,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내공은 좋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기꺼이 함께 하고, 그래서 더 큰 시너지가 되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이 영화를 보고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실감나는 중세 풍경을 고작 노트북 모니터를 통해서 보았다는 점이다. 감독판을 개봉한다면 아무리 상영시간이 길어도 불평하지 않고 극장에서 보는 예를 갖출 것을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