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얼굴 앞에서

영화 안과 바깥

어제가 2021년이고 고작 하루 잤는데 2022년이 되었다. 시간은 같은 농도로 흐르지만 특별함은 늘상 어떤 방식으로 조작된다.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종로 시네코어에서 술을 마시고(면서) 보던 날 부터 한동안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연례행사처럼 그의 영화를 보다보니 영화 속 공간, 인물, 상황들이 체감되었고 서서히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되었다.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영화를 보고 나면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헷갈려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이후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세계

알려진 대로 홍상수와 김민희는 연인사이이고 한국사회에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주류사회에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감금되었다. 광고, 홍보, 시사회도 없는 영화적 행보. 한국의 어떤 영화 평론가도 그의 사생활과 영화를 연결하지 않는다. 마치 다 같이 그래야 한다고 약속이나 한 듯하다. 분명히 홍상수의 영화는 이전과 달라졌다. 표면적으로 한 배우가 2015년이후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 않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택한 홍상수 월드에서 김민희라는 배우는 자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애써 이쁜 척 하지 않지만 어느 영화보다 아름답고 영화의 무드를 지배하고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봄날은 간다’의 그 유명한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은 본래 없다가 생기는 유기체라서 변하는 건 당연하다”. 그들의 사랑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변할테지만, 그들의 아름다운 시절은 영화로 봉인되어 영원히 남겠지.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동시에 보였다. 대사와 상황을 어찌 실제와 떼어놓고 이해할 수 있는가. 

이혜영이라는 모노드라마

늘상 그렇듯 일상적인 대화,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서 비밀이 드러난다. 영화는 여자가 보내는 하루의 여정을 따라 다니며 우리가 스쳐지나는 시간들이 어떻게 반짝거리는지 보여준다. 평범하게 흘러간 것 같았던 하루가 지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영화가 끝난다. 여자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보니 그 하루가 평범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결의 영화다. 극단적인 카메라 움직임도 없고, 부자연스러운 대사도 없다. 살짝 연극적 제스추어가 몸에 밴 듯한 이혜영 배우는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꽃집으로 변한 오래전에 살았던 집, 작은 정원 햇볕에 앉아 처음 보는 꽃집 주인과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살짝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날 함께 술을 마셨던 남자에게 전화받고 깔깔 웃는 장면에선 함께 웃었다. 그렇지. 술을 마시는 순간 만큼은 진심이지. 다음날 정신을 차리기 딱 그전까지는. 

마주보다, 같은 방향을 보다

김민희는 이 영화에서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피사체였던 그녀는 영화를 함께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던 두 사람은 영화라는 같은 대상을 함께 바라 보고 있다. 그들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영화와 영화 밖 세계가 공존하는, 새롭고도 여전한 홍상수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