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
상실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
역병이 창궐한 지 두 해째 여름이다. 첫해엔 그러려니 했다. 따듯해지면 바이러스가 사라질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지만 이렇게 오래 갈지는 몰랐다. 우리는 모두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을 잃었고, 어떤 이는 경제적인 상실을, 어떤 이는 청춘을,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노매드랜드’. 대체 그들이 상실에 대처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극장도 자유롭게 가지 못하는 시간, 절실하게 위로가 필요한 타이밍에 네이버 결재를 했다.
첫째, 스스로 선택하다
네바다주의 엠파이어는 US석고 회사 덕에 생겨난 도시다. 경제위기로 회사가 문을 닫자 도시는 따라서 소멸한다. 우리의 주인공 펀은 병으로 남편을 잃자 밴에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긴 채 길을 떠난다. 첫 장면, 창고 문을 열고 남편의 옷에 얼굴을 묻는 장면부터 눈물이 났다. 울고 싶은 사람을 울게 해주는 것, 위로는 멀지 않다.
안온한 정주의 삶 대신, 거친 길 위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펀은 길 위에서 대자연과 사람들을 만나며 배우고 위로받는다. 몇 번의 정착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거부하고 길 위의 삶을 선택한다.
둘째, 욕심없이 열심히 산다
노매드족들은 기름값과 최저생계를 위해 일한다. 택배가 폭증하는 연말, 아마존은 캠핑장 임대료를 내주면서 그들을 한시적으로 고용한다. 펀은 아마존, 농장, 공장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여름철엔 국립공원의 캠핑장 가이드로 온갖 궂은일을 하며 돈을 번다.
얼핏 자연을 즐기며 자유롭게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길에서의 삶은 척박하고 이겨낼 고난은 산이다. 차를 고칠줄 알아야 하고 비상시를 대처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독한 외로움을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들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고 담배를 나누고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며 더불어 지낸다.
셋째, 이별을 받아들이다
하지만 어김없이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온다. 펀이 함께 생활하던 이들의 자동차 행렬을 향해 손을 흔드는 장면에서 하마터면 또 울 뻔했다. 아직 혼자 살아남기는 미숙한데 어쩌려고 저러지. 왜 굳이 위험과 외로움을 자초하는가. 천천히 그녀의 발길을 따라다녀보면 그녀의 감정에 스며들어가게 된다.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도 있다. 홀로 남은 펀은 조금씩 평화로워진다.
노매드 친구 중 75살인 스완키는 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지만 병원 대신 길 위의 삶을 지속하기로 한다. 그녀는 여행에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을 전하며 여한 없는 완벽한 삶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가장 좋았던 알래스카를 다시 방문한 후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한다. 스완키가 알래스카 영상을 보내자 펀은 조용히 미소짓는다. "해냈구나"
그래서
펀은 떠났던 텅 빈 도시로 돌아온다. 창고에 쌓아두었던 짐을 처분하고 한때 행복하게 살았던 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온전한 상실 그 자체와 마주한다. 그녀는 다시 밴을 타고 떠난다.
이 영화는 한 저널리스트가 3년간 노매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취재해서 낸 책을 바탕으로 했다. 두어명 외에는 전부 실제 책에 나오는 사람이 영화에 등장한다. 다큐에 서사를 덧댄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한편의 시를 읽은 듯한 장대함이 밀려오는 아주 근사한 영화,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유난히 매미 소리로 소란했던 여름이 뒷걸음치는 시간이다. 나는 2021년 여름, 일시적인 이별과 영원한 상실을 순차적으로 겪었다. 이렇게 인생의 한 챕터가 지나가는 것이라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애써 극복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겪고, 울고 싶으면 울고,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가만히 있어 보기로 했다.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극 중 펀이 외우는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