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 눈에만 보이는 것들
“저는 오즈 야스지로우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심심하잖아요”라고 남자가 이야기하자 찬실은 버럭 화를 낸다.
“심심한 게 머가 어때서요? 별거 아닌 게 제일 소중하잖아요. 보석 같은 게 영화에 다 나오잖아요. 영이씨 눈에는 그런 게 안 보여요?”
찬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왜 찬실은 복이 많은 사람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대화의 발단은 이렇다. 찬실은 평소 마음에 품었던 연하의 남자 영과 술을 마시게 된다. 일본식 술집에 나란히 앉아 찬실은 제일 좋아하는 오즈 야스지로우 감독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즐거워한다. 하지만 눈치 없는 영은 그 감독의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분위기를 깨 버린 것이다.
장국영이 나타나다
사실 상황만 보자면 찬실은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소위 예술영화를 찍는 감독의 프로듀서로 오랜 시간 동안 일했지만, 감독이 돌연사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나이 마흔이 되는 동안 일만 열심히 했지만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서울에 저런 동네가 아직도 있나 싶을 정도의 산꼭대기 단칸방으로 이사하는 날, 찬실은 “완전히 망했다” 라고 탄식한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친한 배우 소피는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찬실은 거절하고 소피의 집 가사도우미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런 찬실에게 어느 날 희안한 일이 생긴다.
주인집 할머니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비밀의 방에서 홀연히 나온 남자, 본인을 장국영이라 우긴다. 영화 아비정전을 보지 않은 사람도 알 것 같은 그 유명한 맘보춤 복장, 흰 메리아스와 트렁크를 입은 영락없는 장국영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찬실이 숲길을 걸어갈 때도 슥 지나갔고, 부군당 역사공원에 앉아 있을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오는 날, 대문으로 들어서는 찬실을 창문 안에서 보는 시점이 바로 그였나 보다. 쭉 찬실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점점 찬실처럼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장국영을 믿게 된다. 그는 불쑥 나타나서 따뜻하거나 따끔한 조언을 하며 찬실이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찬실이의 눈에만 보이는 보석들
영화 미나리로 세계적인 할머니가 된 윤여정은 딸을 잃고 혼자 사는 주인집 할머니로 등장한다. 주민센터에서 배운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짧은 시는 찬실과 관객의 마음을 기어이 울리고 만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루하루 애써서 사는 할머니, 철딱서니 없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피, 찬실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었지만 누나·동생 관계가 된 영, 이삿짐을 옮겨주고 응원해주는 착한 후배들, 이들은 찬실의 눈에만 보이는 보석들이다.
버리려던 키노잡지와 비디오테이프와 정은임의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로 대변되는 찬실의 꿈을 따라가다보면, 그 시절에 내가 집중했던 것들과 좋아하던 것들이 가만히 떠오른다. 그게 뭐였더라? 그런 게 있긴 했던가?
영화 속에는 흥미로운 공간이 많이 등장한다. 홍제동 개미 마을, 장국영을 본 부군당 역사공원, 영과 데이트하는 한양도성 길과 어린이대공원. 장국영과 비밀 작전을 짜고 주인집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운동하는 공간도 동네 작은 공원이다.
지인의 도움으로 김초희 감독에게 영화 속 공간에 관해 물어볼 기회를 얻었다. 예산문제로 지방 촬영을 포기하고 서울 같지 않으면서 밝은 분위기를 가진 동네를 주요 공간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부군당과 장국영 귀신의 연결, 어린이대공원 전래동화 마을의 에피소드 등 궁금한 점들을 확인했다.
지천에 널려 있어야 되는 소소한 것들
인터뷰 끝에 감독의 분신인 찬실이 들려주는 것 같은 이야기를 했다.
“거대한 꿈을 이루는 게 행복이라면 그걸 이루기 어렵잖아요. 한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나기는 더 어려워져요. 일상이 단조로울수록 자주 행복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들, 금세 채워지는 그런 수준의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어야 해요.”
김초희 감독은 글을 쓰는 바쁜 일정 속에서 산책하는 시간을 이용해서 전화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일상 속 자잘한 행복을 위해 지천에 널려있어야 하는 소박한 공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준 보람찬 시간이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도 고단한 지경인데, 21세기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역병까지 창궐한 지 두 해째, 지친 우리 영혼을 손전등으로 따뜻하게 비춰주는 사랑스러운 찬실씨, 만나보기를 강추함.
<환경과조경 399호에 실린 필자의 글을 편집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