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스케이프] 환경과조경 405
도시 균열의 시작, 전차 노선이 만든 미완의 풍경
교통에 의한 도시 경관의 균열은 19세기 말 서울에 부설된 전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전차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도시 경관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고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제국의 격에 맞는 근대 도시로 전환을 시도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성 한양에 궁궐과 단묘(壇廟), 성곽을 축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출발을 알렸던 것처럼,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의 표상을 도시 경관에 실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혁명에 의한 체제 전복으로 탄생한 국가가 아니었고, 중국에 대한 시대를 극복하려 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전승 받은 제도를 따르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한제국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근대 도시로의 변혁을 이루어야 했기에, 전통적인 지배 구조로서의 황도(皇都)와 무역 등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근대 도시의 이중적 구조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기준으로 재편된다.
경운궁 동쪽에 건설된 환구단과 황궁우가 황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전차는 근대 도시로의 실천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서대문정거장(지금의 서대문역 일대)에서 시작해 황토현(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종로~흥인문을 지나 홍릉(천장 전 명성황호의 묫자리, 현재 안암동 고려대학교 부근)까지 가는 홍릉선이 먼저 개통되었다. 선로를 부설하여 전선을 놓고 발전기를 돌려 전차가 다니도록 개통한 것이 1899년 5월 4일이다. 우리보다 근대화를 먼저 시작한 일본에 견주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 홍릉선 외에 종로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용산선(1899년 12월 20일),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을 연결한 의주로선(1900년 7월 6일), 그리고 마포까지 연결된 마포선(1907년)까지 네 개의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네 개의 전차 노선을 보면 부설의 목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홍릉선은 이른바 황실 도로의 노선을 따른다. 고종은 도시 개조 첫 사업으로 황토현에서 홍릉까지 동서로와 공통교에서 숭례문까지 남북로 확장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홍릉선의 원래 노선이었다. 나중에 경인선 연결 문제 등으로 출발역이 서대문정거장으로 변경되었지만, 이 노선은 대한제국의 의례 동선이자 국가 장징 도로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용산선, 의주로선, 마포선은 모두 물자 수송을 위한 상권 활성화의 목표로 이어진다. 예부터 중국을 오가기 위해 이용했던 돈의문과 숭례문을 도성 밖에서 연결하고, 한강으로부터의 물동량이 많았던 마포선과 경인선 건설로 중요 거점이 되는 용산까지, 조선의 도시 골격을 그대로 계승하되 물자 수송의 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했다.
그러나 전근대 도시의 질서는 영원하지 못했고 전차 노선이 개통한 지 8년이 지난 1907년에 성곽부터 허물어졌다. 헤이그 특사 파견 실패 이후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면서 성벽의 실제적인 철거는 1907년 7월 30일 일본이 설립한 성벽처리위원회에서 단행했지만 이런 이유가 아니었어도 성곽은 결국 철거됐을 것이다. 홍릉선 개통 이후 전차 노선은 계속 확장됐고 경인선, 경의선 등의 열차 노선까지 얽히면서 숭례문과 흥인지문 일대가 나날이 혼잡해진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아뢰기를,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 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의 좌우 성첩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선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栽可)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48권, 고종 44년 3월 30일, 1907년 대한 광무 11년)
성벽의 철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도시로의 전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다만 그 변용의 과정이 조금씩 달랐을 뿐이다. 비엔나와 파리는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순환형의 링 로드를 건설하여 도시를 개조했다. 베이징은 1954년 정양문 등 극히 일부 문루만 만겨두고 황성과 내성, 외성을 모두 새체하여 두 개의 환형 도로를 건설했다.
대한제국의 전철 부설은 근대 도시로의 진입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그 자체가 근대 도시 계획의 요소가 되지는 못했다. 전근대 질서와 근대의 변혁을 함께 실천하기에는 시간도, 재력도, 경험도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불안한 근대 풍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28~35쪽.
신경진, "[뉴스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4> 황제의 도시 베이징 (하)" 중앙일보 2011년 2월 9일.